로마인 이야기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는 총 8권에 달하는 장편 대작이다. 이 책은 지은이가 철저한 이탈리아 원어 자료 조사를 거쳐 집필한, 이제까지 나온 로마 제국 연구 중에서 '톱 클래스'에 속하는 작품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다음과 같은 글로써 이 대작의 서론을 삼았다.

   "지성에서는 헬라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 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르투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만이 마지막 승자로 남아 번영할 수 있었을까?"

 나나미는 로마인의 인재 등용 및 관리 시스템을 한마디로 '유연성'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로마의 정계나 군대에서는 상위직에 있었던 사람도 필요에 따라서는 하위직에서 일하는 것을 결코 부끄럽다거나 부적절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로마에서는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버금가는 최고 관직인 집정관을 지낸 사람도, 후에 재무관에 선출되면 거기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이렇게 직위에 대해 유연했던 그들의 사고 방식은 서로 다른 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로마는 그 당시 고대 국가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쟁에 패한 장수를 죽이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는 나라였다.  또한 전에는 적이었다 해도 능력만 있으면 신분, 국적, 인종에 상관없이 출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군에게 오랜 세월 치욕을 주었던 삼니움족의 장군 한 명은 능력을 인정받아, 후에 로마 최고의 벼슬인 집정관에까지 올랐다. 이렇게 실력 중심의 탁트인 인재 등용으로 인해 각국의 인재들이 앞을 다투어 로마의 지배 아래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또한 같은 라틴족에 대해서는 출신지를 따지지 않고 시민권을 부여했으며, 적국 출신도 일정 기간 로마에 거주하기만 하면 시민권을 딸 수가 있었다.

   로마인은 싸울 땐 무섭게 싸웠지만, 일단 로마의 점령국이 되면 아주 자비로운 통치를 베풀어서 타민족이 쉽게 로마에 동화할 수 있게 했다. 이 같은 포용력이 로마로 하여금 편협했던 아테네나 스파르타와는 달리 도시 국가의 한계를 넘어 세계 제국으로 가게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연한 인재 등용 및 관리 시스템으로 로마에는 탁월한 리더들이 요소 요소에 많았다. 분야 분야마다 리더층이 두꺼웠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임금이 된 로물루스가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지 않고 국정을 3개 기관에 나눔으로써 시작한 것이 로마 특유의 통치 체제의 틀을 잡았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한복판인 작고 낮은 일곱개의 언덕에서 시작되었는데, 바다를 접하고 있던 아테네와는 달리 육지에서 계속 적들과 마주하고 있어야 했다. 벌써 위치적으로 늘 전쟁을 치르고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오랜 전쟁 경험을 통해서 공동체에는 유능한 리더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탁월한 리더십을 양성하고 그들이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통일된 지휘 체계를 만들어야 함을 갈수록 깨닫게 된다. 그러나,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인종과 타고난 신분이 실력 위주의 인재 양성 시스템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로마도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뉘어져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종식시키는 일대 사건이 외부로부터 발생한다.

   바로 게르만계 켈트족의 대침입이다. 기원전 390년 용맹스런 켈트족은 로마군을 연파하며 마침내는 수도 로마로 진입, 일곱 달이나 로마를 점령하고 철저하게 도시를 파괴시켰다. 건국이래 수도가 짓밟힌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 수치로 잠에서 깨어난 로마인들은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뉜 국론 분열이 나라의 힘을 약화시켰음을 깨닫고 뭔가 획기적인 조치가 필요함을 인식한다. 마침내 기원전 367년,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이라고 할 수 있는 리키니우스 법을 통과시키게 된다. 이 법은 모든 관직을 평민, 귀족이라는 신분의 차이 없이 전면 개방하는 혁신적인 인재 등용 시스템이었다. 국가 요직의 전면 개방은 완전히 자유 경쟁 체제 속에서 오직 실력으로만이 리더십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시스템을 탄생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런 개방성을 바탕으로 로마인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공화적 정치 체제를 확립했다.  집정관을 통해 왕정의 독재성을 보완했고, 신분의 차이 없이 경험과 능력 위주로 선발된 인재들이 원로원을 구성한다. 또한 민회라는 국가 최고 결정 기구를 두었다. 기원 4세기 중엽에 벌써 귀족 계급의 아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다스리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 같지만, 귀족 정치와는 달리 그 소수의 혈통을 문제삼지 않고 오직 실력과 경륜을 따지는 과두정치 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이 시스템의 특징은 신분을 초월한 공평한 자유 경쟁의 기회, 그리고 서로의 독주와 단점을 견제하고 보완해 줄 수 있는 힘의 분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그 당시로는 거의 파격적인 인재 양성 시스템을 도입 한 로마는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양질의 인재들을 많이 배출해 낼 수 있었고, 이렇게 해서 다져진 로마의 두터운 리더층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엄청난 플러스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후에, 로마의 라이벌인 카르타고가 낳은 희대의 전략가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와 10년이 넘게 로마를 공략했을 때도, 로마는 탁월한 장군들이 여럿 있었던 까닭에 한니발 한 사람밖에 없는 카르타고의 후방을 교묘히 공략하며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고 만다. 그래서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전설적 영웅이었던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이 살아서 로마와 부딪쳤다고 해도 결국은 로마가 이겼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의 군대에는 탁월한 리더가 알렉산더 한 명뿐이지만, 로마에는 적어도 그를 견제할 11명의 뛰어난 장군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리더층이 두터운 로마는 한 영웅의 죽음이 당장 국가적인 손실과 결부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양질의 리더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리더들은 자신들의 탁월한 실력과 경험을 다 체계적인 메뉴얼로 정리해서 후손들에게 물려 주었다. 로마인들은 규범 (manual) 만드는 것이 습관화된 민족이다.  야영 텐트 하나 치는 것까지도 철저하게 교과서화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능력의 지휘관이면 교과서대로만 하면 전멸은 면하게 되어 있다. 또한 이 교과서는 그대로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쟁을 치르거나 새로운 학문이 소개될 때마다 생생한 현장의 경험과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끊임없이 개선되었고, 이것은 또 바로 현장에 적용되었다.

    한 예로 로마가 산악 민족 삼니움족과의 싸움에서 패했을 때, 삼니움족이 사용한 무기인 투창의 효과가 높았던 것에 주목하여, 그 다음 전투부터는 바로 그것을 즉시 로마군의 무기로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나만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야만족들에게서도 탁월한 것은 거침없이 배우고 수용하는 로마의 개방성이 그들의 빠른 발전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이 로마인의 메뉴얼 만드는 습관은 그들의 끝없는 자기 개혁과 배움에 대한 개방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a non uno die aedificata est)"란 말이 있듯이, 로마가 이토록 탁월한 리더십 양성 시스템과 메뉴얼을 가지게 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의 노력과 나름대로의 시행착오를 통한 자기 각성이 필요했다.

   그들은 새롭고 탁월한 것이면 누구에게든지 배웠고, 배운 것들을 더욱 개량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로마인들은 나라의 기초를 세우면서 사찰단을 각국에 보내어 그들의 장점과 단점을 유심히 관찰하고 배워 오게 하였다. 특히, 이들은 지혜롭게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잘못된 점들 또한 잘 꿰뚫어 보고 그들의 것을 일방적으로 답습하지 않았다. 또한,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들을 바로 현실 개혁에 도입시켰다. 앞에 말한 켈트족의 로마 점령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통해 그들은 연합 종교 행사가 주목적이었던 기존의 허술한 라틴 동맹을 강력한 군사 협력 관계를 기초로 한 로마 연합이라는 새로운 체계로 만들어 낸다. 로마인들은 政敵이 죽어도 그가 남긴 업적이 탁월하면 그것을 계속 보존하고 개발시켰다고 한다.(당시 다른 나라들은 정적이 죽으면 그가 쓴 책을 비롯하여, 그의 손길이 간 모든 업적들을 다 파괴해 버리는 게 관습이었다). 로마가 얼마나 배움에 대해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로마는 한 명의 천재에게 나라의 운명 전체를 거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어떠한 인간도 완벽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으며, 아무리 탁월한 사람도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또 거대한 세계 제국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다수의 탁월한 리더들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일까? 귀족 정치와 왕족 정치로 일관했던 그 당시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과는 달리, 전 국민에게 관직을 개방하여 신분에 상관없이 실력만으로 자유 경쟁케 해서 인재를 발탁했음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능력을 발휘하며 국가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엄선된 리더들이 또한 좋은 것이면 적으로부터도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든다는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자신의 실력을 끊임없이 키워 나갔다.

  그리고 적당한 힘의 분배와 견제 체제를 통해 서로의 실수와 잘못을 억제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했다는 것은 로마가 역시 보통 나라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한마디로  말해서, 살아 있는 핵심 리더십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